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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 칼럼>선죽교(善竹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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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미래신문) 2007년 나는 개성에 갔었다. 당시 북한은 한국이 돈을 준다니, 금강산과 개성을 개방해서 관광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얼마간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원장이었기에 전국 대학교 대학원장들이 단체로 당일코스의 개성을 관광하게 되었다. 휴전선을 넘어 북한 버스에 승차하니 남자 안내원 두 명이 우리를 안내를 했다.

한 사람이 안내하면서 제일 많이 언급한 것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그때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대통령이 북한에서 그토록 인기가 많고, 존경 받는 대통령인줄 처음 알았다.

앞으로 만에 하나 개성관광이 다시 열린다면 버스 안내원이 <문재인>대통령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대통령들은 <우리 민족끼리>에 가장 관심이 많고, <연방제통일>이 소원이었기 때문일 듯 싶다.

 

개성 관광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선죽교>였다. 특히 나는 연일 정씨의 조상이 된 포은 정몽주 선생의 후손으로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그래서 돌로 된 선죽교를 몇 번이고 왕래하면서 500년전 역사를 묵상했다.

포은 선생은 다 쓰러져가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이방원이 시킨 테러리스트에 의해서 바로 선죽교에서 철퇴로 피살 되었다.

그전에 포은 선생은 이방원의 회유인 <하여가>에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사실 이씨 조선은 이성계의「위화도 회군」이란 반란군의 쿠데타에 의해서 탄생 되었고, 그과정에 고려의 전 정부에 애정을 가진 자들은 모조리 무참히 죽였다.

포은 선생은 사후에 그의 충절이 인정되어 복원 되었다.

 

오늘날 포은 선생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지금 한국사회는 <충(忠)>도 없어지고, <효(孝)>도 없어진 마당에 포은이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정권이 바뀌면, 사람들은 의리도 없고, 줏대도 없고, 과거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마차를 갈아타는 것이 지혜롭고 출세에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뭔 놈의 절개니, 의리냐는 사람들도 많다. 예, 예, 아니오, 아니오 도 할 수 없다.

그냥 눈치 빠르게 정권에 아부하고, 돈만 주면 꺼벅 죽어지는 세상이다.

 

사람들의 세계관은 유물주의로 가득 차있고, 배금주의로 천박해져서 진리이고 정의고 상관없는 파렴치 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꾼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찬탈하고, 정권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요상한 공작으로 멀쩡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천길 낭떠러지에 밀어 넣고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비정하고 무정한 사회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한국교회도, 교단도 아주 비슷한 점이 있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고, 교회의 치리는 말씀과 성령, 교리, 헌법과 예배 모범에 따라야겠지만, 큰 교회일수록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막 나간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목사는 어느새 교황 비슷하게 되어간다.

대개 큰 교회는 교단과 상관 없고 당회장이 곧 법이 된다.

 

필자는 1985년에 총신의 총장직에서 강제로 퇴출되었다.

이유는 70회 총회에서 교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니 새로운 교권세력이 흡사 검찰이나 수사관들이 쳐들어 오듯이 학교에 와서 나에게 녹음기를 갖다 대고, 겁박을 하면서 ‘새로운 지휘부에 협력하라!’고 얼음장을 놓았다.

그들은 나를 호텔 또는 도서관 뒷방에 몰아넣고 겁박을 했다. 흡사 오늘날 정권이 바뀌는 방법과 아주 비슷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시 부 이사장 이영수 목사는 실권을 잃어버리고 있었을 때, 내게 전화를 걸어 “정 박사, 어찌하던지 일단은 살아남으시오”라고 권고 했다.

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포은 선생의 후예입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손바닥 뒤집듯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 후 이사회는 나를 해임했고, 약 5개월동안 로봇트로 만들어 총장실에 유패 시켰다.

새 지도부는 총장의 전용 승용차를 빼앗고, 결재 판을 빼앗고, 비서도 없애 버리고 오직 학교 직인(職印) 하나만 가지고 총장실에 매일 출근을 했지만, 개미 한 마리 찾아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5개월 후 교육부에서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조치가 내려오기를, ‘총신에 불법이사들이 총장을 해임한 일은 잘못된 것임으로 귀교는 일주일 이내로 즉각 원상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로 인해 나는 다시 총장으로 복귀되었고, 총장 승용차와 결재 판, 모든 것이 회복되었고, 졸업식을 주관했다. 나의 공의가 백일천하에 들어났다.

그러나 나는 총회의 화합을 위해서 사표를 제출 했다. 그 후 나를 겁박하던 인사들은 나의 흔들림 없는 태도를 보고 오히려 나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후에도 총신 총장 대행을 두 번이나 했고, 다시 대신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정치가가 됐든, 목회자가 되었든, 학자가 되었든,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고, 세상풍조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한다. 마5:37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했다.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가 위태로운 시기에, 모두들 뭐가 그리 두려워서 ‘아니라’고 말 한 마디 못하고, 뭐가 그렇게 겁이 나서 옳은 일에 ‘예’라고 말 한마디 못하는 걸까?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선봉장, 순교자 박관준 장로님의 마지막 시의 마지막 구절을 소개한다.
 
“예수 나를 위해 죽었으니, 이제는 내가 예수를 위해 죽을 차례라!”

박 장로님은 해방을 얼마 앞두고 순교하셨다. 적어도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라면 이만한 배짱과 배포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오늘날은 이러한 지도자가 보이지 않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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