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8 (토)

  • 맑음동두천 24.7℃
  • 맑음강릉 31.4℃
  • 맑음서울 25.8℃
  • 맑음대전 26.6℃
  • 맑음대구 28.5℃
  • 맑음울산 27.7℃
  • 맑음광주 27.4℃
  • 맑음부산 23.1℃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23.9℃
  • 맑음강화 22.7℃
  • 맑음보은 25.5℃
  • 맑음금산 26.7℃
  • 맑음강진군 25.1℃
  • 맑음경주시 29.7℃
  • 맑음거제 24.5℃
기상청 제공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고전1:18-25) 20191215

URL복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고전1:18-25)

 

바울은 당시의 모든 이권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에다가 최고의 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키워진 최고의 인텔리,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어느 문화나 학문, 정치에서도 뒤질 것이 없는 당시에도 최고의 기준에 서있는 바울이 그러한 자신의 이권을 벗어 던지고 주님의 편에 섰다는 것이고, 사실 그것은 바울의 원한 바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하심 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증거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만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것을 가지지 못하고 말하면 사실 호소력이 약합니다. ‘저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성토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울이 당시의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도 대단한 하나님의 지혜이고 가치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조건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고, 십자가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오늘 성경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냥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한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Ⅰ. 세상의 기준을 뒤바꾸는 지혜(18~20)

 

십자가의 [도, logos, 말씀, 예수 그리스도, 요1:1; 요일1:1]의 신비를 증거 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꼭 같은 이 생명의 원리가 이미 정해진 사람의 형태에 따라 이해되는 것이 다르다고, 멸망하기로 준비된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 moria, 불합리] 당연한 것입니다. 당시에 헬라 철학에서도 로고스는 최고의 우주적인 원인이자 모든 것의 본질인 인격체라고 믿었는데 최악의 사형도구인 십자가와 로고스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이라는 데서 부정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기에 합당한 자들에게는 이 세상적인 不合理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니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결국 세상의 지혜와 총명이 영원의 세계에서는 쓸데없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래서 세상에서 큰 소리 치던 사람들이 하늘에서는 큰소리 질 수 없는 존재들이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공평하신 섭리이시다. 세상의 기준은 사람의 지식의 판단으로 이치에 맞는 것이어야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지식의 기준을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뒤바꾸신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상의 최고의 기준은 ‘능력, 지혜, 선비’였고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모든 입장에서 비웃는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에 부르심으로 세상의 가진 것들을 오히려 헛되게 만들고,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불러들이는데 공평하십니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신령한 것에 관해서 지혜가 있다.”고 큰 소리 칠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는 주님의 증거가 인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늘의 신비한 지혜를 가진 자는 없고 아무리 유능하다고 하는 유대의 서기관들조차도 자신들이 계속해서 베껴 썼던 율법의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없어서 그 율법에서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20f) 결국 인간 최고의 지혜를 가졌다고 자랑하던 헬라의 지혜였던 철학도 영원의 세계를 욕심내보지만 결국 쓸데없는 것이었고, 종교적으로 앞서있다고 율법을 들어 자랑하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논리를 이해하거나 나타내는 데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결국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자신들의 한계에서 구원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벌써 인간의 틀에 갇히고 말며 무한한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세상의 모든 틀을 허물어 버리고 하늘에서부터 시작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한 구원입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편견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 덕택에 헬라의 지혜자들도 아니고 히브리 율법을 알지 못했던 오늘 우리들조차 이 십자가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Ⅱ. 세상의 편견을 뒤엎는 하나님의 방법(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에서 계속적으로 다루는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11:34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고 말한바 있다. 바로 뒤에 가서도 비슷한 표현을 쓰고 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고전2:16f) 하였습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우리 사람의 머리로는 아무리 연구하고 생각해도 하나님의 오묘한 사랑과 섭리를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세상이 가진 지혜는 어두움의 지혜, 악의 지혜이기 때문에 이 지혜의 도구를 헛것으로 만들어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시다.

 

특히 여기에 쓰인 ‘이 세상, kosmos, 창조된 질서 우주, 비유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반대편에서 하나님을 대적해 오고 있는 세력의 영향아래 있는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구원의 방법은 물론이고,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신 십자가의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 데는 왜 그 신비한 지혜의 방법을 쓰지 않으시는 것일까?’ 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 어리석고 완악한 세상에 보다 효과적인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시면 효과 면에서 사람을 통한 비효율적인 전도의 더딘 방법보다 큰 효과를 나타낼 것 같은데, 그러한 방법을 쓰지 않으시고 구태여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이 방법으로만 죄인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역시 앞의 말씀과 다르지 않은 것을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일세기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다면 역시 당시에도 가장 존경 받던 철학자들이 먼저 구원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고 무식하고 미련한 사람들은 제외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지식, 무식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더하게 하심으로 편견 없이 공평한 은혜를 모두가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Ⅲ. 세상 가치의 공평한 지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22~25)

 

세상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각자의 형편에 따라 모두가 다릅니다. 가난에 찌들려 본 사람들은 부자가 되어보는 것이 꿈이고, 무식으로 설음 받은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무식을 벋어 던지고 사람들에게 유식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온 갓 애를 다 쓰는 것들을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보아오는 사실입니다. 돈 좀 실컷 벌어 쓰다 죽었으면, 무식하다고 설음 받는 데서 무시하는 사람들의 콧대를 눌러놓을 정도로 인정을 받고 싶어서 가짜 학위라도 가지고자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부의 피해자나 지식의 피해자들의 가장 일반적인 소원들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①표적의 민족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표적을 통해서 살고 계속 표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오죽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집요하게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마16:4)고 거절을 하셨을까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②지혜를 자랑하는 그리스인들 즉, 이방인들에게 어리석게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가장 처참하게 죽이는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는가 또 어떻게 그렇게 약하게 죽은 사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가 의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큰 능력, 얼마나 큰 지혜이십니다.

전 인류를 다 구원할 만큼 큰 능력입니다. 하나의 십자가, 한 번의 십자가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구원할 만한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전 우주를 밝힐 지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이치를 말합니다. 죽음으로 사랑하면 모든 것을 다 살린다는 인생의 이치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화해의 지혜가 있습니다. 원수가 된 것, 둘이 된 것을 하나가 되게 하는 이치를 십자가는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 지은 인간이 하나가 되게 하는 무궁한 지혜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능력, 이보다 더 한 지혜를 본적이 있습니까? 세상에 이 보다 더 큰 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말은 ‘에스타우로메논’이란 헬라어입니다. 이 말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십자가 못 박히셨지만 지금도 그 대속적 효과가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때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한 그리스도의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우리 전할 것, 전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현재적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표적이나 지혜로 설명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오래 전 영국의 한 예배당 옆에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라는 글을 써놓았다고 합니다. 그 때 교인들은 열심히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얼마 후 시대가 변화하여 사람들은 십자가를 말한다는 것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정의를 외치고, 정치를 논하고, 철학을 말하고, 도덕 문제를 설교했습니다. 그 교회 담에 있던 담쟁이 넝쿨이 ‘십자가에 못 박힌’이란 글씨를 가리고 말았고 교회 담에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라는 말만 남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우리의 전파의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대 성인 중의 한 사람도, 도덕주의자, 문학가,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아닙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신 구레뇨 시몬이 십자가를 진 그는 이후 큰 복을 받아 아내와 아들 루포가 크게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구주이십니다.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