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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19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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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미래신문)

 

들어가며

 

2021, 부르기도 좋은 숫자


2021, 부르기도 좋은 숫자인 올해는 현 시대 인류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해(年)일 것이 미증유의 COVID-19라는 가공할 유행병을 만났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19라는 질병명은 이 바이러스가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최고의 창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처럼 어리석은 존재도 없다.

그 이유는 자기기만과 과거망각 또한 과대 현실 안일의식을 가진 피조물이 인간 외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시공간에는 전쟁이나 치명적인 유행병이나 지진과 태풍 같은 자연재해는 없을거야, 난 아니지” 바라고 믿고 산다.

그러나 역사는 14세기 유럽에서 7500만~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사상 최악의 범 유행의   흑사병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18년 발생하여 1700~50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을 생생히 기록한다. 과연 이 같은 엄청난 팬데믹 이야기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태곳적 먼 나라 이야기일까? 현대의학의 발달로 그 때보다 사망자의 수효는 훨씬 적겠지만 21세기 들어 처음 겪는 팬데믹 피해라는 점에서는 두려움의 중량이 흡사하다 하겠다. 

 

그리스도인은 사건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


그리스도인은 사건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지구상 78억 인류에게 불어 닥친 코비드-19가 주는 기독교적 의미와 교훈은 무엇일까  코비드-19에 맞춰 열아홉 가지로 묵상해 본다.

 

몸 말

 

만물의 영장 인간 약함의 역설

 

하나, 인간은 미미한 존재다.

 

코비드-19는 만물의 영장 인간이 먼지보다 못하고 벌레보다 못한 미미한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자고이래 인류가 경험했듯이 인간이 건설한 높은 문명의 탑은 한 순간 자연재해나 기근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에  의해 수없이 무너졌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이토록 지구촌이 혼란과 혼돈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을 노출시킨 적이 없었다. 만물 앞에 자고한 인간의 무너짐을 증명한 것으로 동물과 식물 앞에 부끄럽다.

 

둘, 완전한 의사이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자

 

코비드-19는 인간이 쌓아 올린 의학과 과학의 바벨탑이 미물 바이러스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냄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유럽 선진국에 대한  환상을 깨게 한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영국은 10만명당 81명, 미국은 77명이 죽었는데 베트남은 0.04명에 불과하다”면서 “선진국의 허상이 드러난 것”이라고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 말했다. 동시에 코비드-19는 질병의 근원지가 인간일지라도 그 질병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욥5:18)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91:3)라는 성경말씀을 통해 소망을 갖는다. 아울러 죄 사함의 은혜를 구하는 눈물의 기도가 필요함을 배운다. 질병을 깨끗이 치료하시는 여호와 라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들 때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왕하20:5)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셋,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코비드-19는 두려움에 떠는 인생들에게 진정 두려워할 대상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신 심판자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일깨운다. 구약성경의  작고 큰 전쟁, 출애굽의 다섯, 여섯째 재앙인 가축돌림병과 악성종기의 배후 조종자(controller)가 하나님이 아니셨던가.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태생적 영적 존재이다. 하나님과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복이라는 사실을 천명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4). 코비드-19라는 골리앗에 눌려 공포(horror)에 떨 것이 아니라 생사화복 여탈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적 신앙(fearing God)이 요청된다.

 

넷, 인간은 절망적 존재인가?

 

코비드-19는 인생은 짧고 하나님 없는 인생은 허무하다는 실존적 절망과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성경적 종말론 신앙을 불어넣음으로 심판의 하나님을 대면하게 한다. 무신론적 실존철학자인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는 치명적인 폐수종으로 병상에서 죽음의 공포로 발악했다. 자신만만했던 노(老) 교수의 모습을 지켜본 기자가 “심판의 하나님을 만난 사실이 사르트르를 공포로 몰아넣어 그로 죽음을 그토록 거부하게 했다.”라고 말했다. 여러분은 어떤가?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행동

 

다섯, 종말의 서막인가?

 

코비드-19는 얼어붙은 세계를 보며 종말의 이니셔티브, 예수님의 재림의 서막을 알리는 하나님의 경고음, 하나님이 두드리시는 망치소리임을 들려준다. 해를 거듭할수록 상상을 초월하여 발생하는 자연재해와 이미 진행 중인 기후변화와 더불어 금세기 처음 경험하는 코비드19는 신자는 물론 비신자까지 하나님의 둠스데이(doomsday) 곧 하나님의 재림을 응시하게 했다.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 때는 있을 것이고 지금 가까이 오고 있음을 떨림으로 느낀다.

 

여섯, 이단을 향하신 하나님의 외과적 타격

 

코비드-19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신성모독죄와 성경오도의 죄를 일삼는 이단사설을 기필코 심판하시기 위해 역사가운데 개입(intervention)하신 신적 비상섭리임을 목도하게 한다. 이만희 신천지가 한국 코로나 유행의 근원지가 되어 그 동안 방어책과 공격책에 무력한 한국교회 대신 공권력으로 상승일로의 신천지 위세를 꺾게 했다. 하나님이 쏘신 정확한 외과적 타격(surgical strike)이 아닐 수 없다. 이즈음 한국기독교는 전열을 다듬어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사설 대처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일곱, 하나님이 울리시는 구원의 종소리

 

코비드-19는 질병을 보내시고 거두시는 분이 우주의 주재자 하나님이심을 기억케 하여 하나님을 떠난 백성인 무신론자와 명목상 신자의 삶을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나팔소리이다. 하나님이 외치시는 구원의 종소리, 사랑의 종소리인 셈이다. 성경과 일반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은 고통을 허락하신 뒤 인간의 회개를 불러일으키시고 축복의 역전 드라마를 엮으신   베스트 연출자이셨기에 그렇다. 그 분의 관심과 최종목표는 인간의 구원에 있다. 그 종소리에 반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반응

 

여덟, 여기에서 저기로

 

코비드-19는 생사 갈림길에서 한시적인 이 땅의 삶에 견고히 정착한 인생들이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소망하게 한다. 하루에도 수 천명씩 죽어가는 참상을 직시하며 이 땅 중심을 살아온 사람들이 드디어 영생의 나라를 염원케 했다. 육신을 위해 살던 '여기' 인생들에게(here centered people) '저기' 영원한 세계(the eternal world up there)를 바라보게 한 대전환점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배제한 교만한 인본주의를 숭상하며 사망의 길로 치닫는 창세기 11장 바벨탑 세상에 찌든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현대인들의 살 길이 ‘그곳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저곳으로’ 옮겨가야 산다는 창세기 12장에로의 도피와 도전 그리고 회개만이 살 길임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아홉, 중앙 성소 예배의 소중함

 

코비드-19는 대면예배의 소중함과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절감하게한다. 예배의 장벽이 없던 예배 호황시기 일부 교회에서는 신자수 늘리기에 급급하여 소비자 친숙교회(user friendly church)란 이름으로 예배자가 아닌 소비자 개념의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의 예배를 받으시지 소비자의   웅성거림을 받으시지 않는다. 코로나 시기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암울한 시기를 맞아 교회는 성경적 예배로 회귀해야 한다. 코비드-19는 테크놀로지의 이기에 침잠(沈潛)되어 인터넷 예배, TV 예배 등 편리주의에 친숙한 적지 않은  신자들의 가짜 예배의 오류를 강제적으로 드러나게 했다. 또한 예배당 중심의  예배에 생명을 건 신자들에게 성경이 가르친 함 마콤(המקום 그 장소, the place)   중앙 성소 예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 후   그 땅에 산재한 산당의 우상숭배를 우려하신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정하신 예배처소가 있으니 바로 중앙성소인 것이다. “네 하나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신16:15). 

 

열, 세월을 아끼라

 

코비드-19는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이해하고 살기도 버겁다는 시간의 절박성을 훈계한다.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가르친다. 각자에게 찾아올지 모를 코로나의 기습에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며 사는 실천적 신앙이 절박하다. 언제 이토록 자신의 신앙을 코람데오(in the presence of the Lord) 적나라하게 조사받은 적이 있었던가. 치열하게 세상살이 하다 만난 괴(怪) 불청객으로 더더욱 분주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차분히 은거(?)하면서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법도를 하나씩 찾아 구슬을 꿰매는 순종과 헌신의 길로 걸어갈 때가 지금이다.

 

열 하나, 나는 책임적 존재다

 

코비드-19는 내(위생, 죄 등)가 너와 이웃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책임적 존재라는 연대성(連帶性: sodality)의 원리와 지구촌 식구의 의무를 교훈한다. 2020. 11.25 기준 수도권의 경우 확진자 1명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재생산지수가 2.23을 기록했음은 각 사람이 가족, 사회, 국가, 지구촌의 책임적 존재라는 사실을 실증한다. 내가 살고 남이 사는 길은 내가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는 길이다. 한편 일부 교회의 방역미비로 인한 확진자 발생이 전(全) 한국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온상인 것으로 오도됨을 우려한다. 사회구성체 어디에서나 가능한 확진자가 교회에서 발생했다고 해서 교회가 코로나 바이러스 전파의 주범이나 진원지는 아니다. 이럴수록 교회가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아 전도길이 막히지 않도록 오늘 나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열 둘,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코비드-19는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5)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나의 회개'가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와 세계 회복의 원점임을 깨닫게 한다. 예수님은 무너진 망대사건을 통해 망함(ruin)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개연성(probability)의 이슈이고, 그 개연성으로부터의 탈피는 회개임을 분명히 천명하신 것이다. 코비드-19는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법칙의 순리를 거슬린 인간의 죄와 교만이 불러온 부메랑이 아닐 수 없다. 나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함의 순차(順次)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열 셋, 공짜 산소

 

코비드-19는 우리가 공짜로 마셔온 산소가 얼마나 비싸고 귀한 하늘의 선물인가를 실감한다. 중증환자들이 에크모(Extracorporeal Membrane Oxygenation; ECMO)라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모습을 보라. 그 기계가 모자라 어떤 이는 병원 화장실에서, 집에서, 노중에 사망한 기사를 보며 무엇을 보는가? 산소조차 피조물을 향하신 조물주 하나님의 엄청난 공짜 선물이란 사실이다. 중증폐렴, 급성호흡곤란으로 인한 치사는 결국 산소공급의 문제가 아니던가? 동절기 자택의 난로에 장작을 태우며 새삼스레 나무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저것 인간에게 아낌없이 주다가 결국 자기 몸까지 태워 인간을 따뜻하게 해 주는 나무의 희생을 바라보며 “나무야 고마워” 자주 인사한다. 이어서 “하나님 공짜로 산소도 주시고 산소공장인 초록산천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실 찬양한다.

 

교회 난맥상(亂脈相)

 

열 넷, 교회가 먼저인가? 국가가 먼저인가?

 

코비드-19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설정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해석을 주목하게 한다. 두 기관은 우선순위의 문제로 긴장과 갈등의 중세역사를 갖고 있다. 국가   아래 교회가 있다는 국가지상주의 즉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 반면에 교회우선 즉 교황절대주의(papal absolutism)는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를 받기는커녕 도리어 국가는 교회권위에 순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1077년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의 카놋사의 굴욕). 양극단의 오류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두 왕국론’에 근거하여 두 기관의 상호 독립성을 인정했기에 국가가 교회의 예배 회집 등의 기본활동을 금지명령 할 수 없음을 가르쳤다.

 

최근 미 연방대법원에서 5:4로 교회의 손을 들어준 것은 정교분리 시대의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교회를 향한 공권력의 신사적 겸손한 행사를 가르침이다. 아울러 교회는 한 목소리 시스템 하에 할 말은 확실히 하되 무조건 반발을 넘어선 자발적 셀프 방역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그리함으로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이러한 상호 동등한 파트너쉽에 근거한 상호 겸허한 협력이 있을 때 교회를 향한 백성들의 비판을 불식되고 하나님나라 건설에 이바지하게 된다. 코로나 시기 기독교 포비아 바이러스를 퍼뜨린 사단의 간계에 속아선 안 된다. 기독교가 타 종교에 비해 4분5열 단합된 힘을 갖지 못함으로 정부나 사회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인상을 받으며 차제에 건전한 단일대표협의체의 신(新) 구성 또는 기존대표기관의 자정(自淨)과 개혁을 기대한다.

 

열 다섯, 기독교는 컨택트 종교이다

 

코비드-19가 가져온 일상의 변화는 한마디로 언택트(비대면: untact)이다. 코로나가 만든 신조어 언택트는 단어 그대로 접촉을 의미하는 컨택트(contact)의 반대말이다. 콩글리쉬 언택트이든 잉글리쉬 노 컨택트(no-contact), 제로 컨택트(zer contact)이든 아니면 아예 접촉이 없다는 넌컨택트(noncontact)이든 간에 코로나가 세상을 바꾼 것은 머물기(stay at home)이다. 여기에 발맞춰 실내에서 각종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홈코노미(home + economy)와 집콕(과거엔 방콕)이란 말이 나오기도 한다.

문제는 언택트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들의 이기심을 더욱 촉발시켜 대(對)  사회의 인간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한다. 미래학자들의 이야기처럼 어차피 도래할 미래 언택트 사회를 예행연습한다 할지라도 이는 하나님의 인간창조 목적이 독처가 아닌 나와 너의 공동체요 나아가 생육 번성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에 절대 위반하는 일이다. 기독교는 언택트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접촉하시고자 성육신하신 컨택트의 종교이다. 

 

열 여섯, 사회적 거리두기가 하나님과 거리두기로

 

코비드-19는 신천지의 강세를 약화시키는 대신 사단의 간계로 국민의 지탄과 방역당국의 화살을 건전교회로 돌리는 것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한 온라인 예배로 신자들과 하나님과의 신앙적 거리두기와 서로를 멀리하는 불신사회를 조장한다. 사단은 이 시기 자신의 세력확장의 황금기로 여기고 졸개들에게 특별지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 특명, 그 작전명은 ‘신자 하나님 거리두기’임에 틀림없다. 정신   차려야 한다. 날마다 자를 들고 나와 하나님과의 거리를 재야한다. 근신하고 깨어있어 힘들 때일수록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혀가자. 언제부터일지 모를 하나님과의 유격(裕隔)을 조여야 한다. 자칫 위드 코로나 시기 반복된 사회적 거리두기의 교회 멀리하기가 익숙해져 정작 포스트 코로나 시기에도 그 거리를 유지할까 두렵다.

 

Back to Christ

 

열 일곱, 전도와 선교의 호기

 

코비드-19는 불신자에게 구원의 호기를 제공하며, 기독교회(인)에게 구령 책임감을 심어 급기야 전도와 선교의 긴급성을 가르친다. 영국의 고(故) 존 스타트 목사는 ‘전도하지 않는 죄’(Our Guilty Silence)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죄가 다름아닌 침묵에 있음을 적시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한 신천지 추락을 통해 기존 기독교는 신천지나 여타 이단의 상상을 초월한 포교전략과 열심을 거울삼아 전도와 선교의 고삐를 당겨야 한다. 코로나가 초래한 개인과 회사와 국가의 엄청난 경제적 피해와 각 사람에게 임한 정신적 공황과 상호 불신 더욱이 바이러스 감염과 죽음에 대한 공포 등 기댈만한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와 선교의 찬스가 바로 이 때다.

 

열 여덟, 복음전도의 신형무기 개발

 

코로나19는 기존 전도와 선교의 방법론 변화가 절실함을 보여준다. 한국교회가 정부와 지자체의 방역지침에 따라 전면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한지 오래이다.   한국군대도 11월 들어 거리두기 강화에 따라 출입이 원천봉쇄된 상태이며 현역군목들마저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 비대면과 대면을 오락가락해야 하는 상황을 맞아 군은 물론 한국교회의 전도와 해외선교의 방법론을 대폭 수정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름하여 현장중심활동(field oriented ministry)으로부터 원거리 전략적 선교활동(remote strategic ministry)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성소중심의   예배와는 별개의 이슈로 언택트 시대 손 놓을 수 없는 특단의 사역이다. 예 들어, 군의 경우 SNS를 통한 기독교 컨텐츠 송신, 기독교서적 택배, 기독교영화와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제공, 부활절 계란과 성탄절 메시지 카드와 선물꾸러미 군 선교대상 부대 앞 직접전달, 기독교 주요간부 1대1 만남, 군 선교용 적절한 자료제공 등 기술적 선교방식 개발과 시행이 필요하다. 해외선교의 경우는 중국의 선교사 집단추방과 인도와 중동국가들의 선교사 추방이 급증하는 선교의 위기시대와   해외여행조차 통제된 코로나 시기를 맞아 현장중심선교로부터 유연성있는 다양한 원거리 전략적 선교방법론 수립이 시급하다.

 

열 아홉, 예수가 답이다

 

코비드-19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요 해답이라는 선명한 복음을 선포한다. 코로나 시대,      비 코로나 시대시대를 막론하고 인류에게 세상이 주는 답은 없다. 인류는 행복찾기를 위한 경주자로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이, 과학이, 의학이, 예술이, 뉴에이지가, 종교가, 선각자가, 구루(guru)가 행복을 선사할까 인류는 기웃거린다. 그러나 세상이 행복과 평안을 선물하지 못한다.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 “밥은 굶어도 희망은 굶지 마라” “일어나 뛰어 넌 할 수 있어”  “행복이 뭐 별건가요” 그런 사람이 왜 자살하는가? “앞으로도 어떤 선택을 하든 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겁니다.” 소리높인 개그우먼 박지선 씨가 왜 어머니와 함께 자살하는가? 인생의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 결박되어 불에 던져진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기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기에, 오직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걸어가기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결박되고 불 가운데로 던져진다.  그러나 우리가 견고히 예수 유일신앙을 지켜나갈 때 상황은 정반대로 열린다.  오히려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 된다. 세 사람 위에 한 사람이 더해진다. 우리를 묶었던 세상의 결박이 풀려지고 한 분,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한 분 예수님께서 함께 걸으신다. 한 분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뜬히 세상을 놀라게 한다. 그리하여 이방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처럼 불신자들이, 온 열방이 그렇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야 한다. 코비드-19로 어지러운 세상에 예수가 답이다. 예수가 답이다. 예수가 답이다.

 

나가며


그렇다면 미국의 고(故) 프랜시스 쉐퍼 박사의 명저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How should we then live?)에서 지적한 대로 기독교 진리인 성경에서 어두운 코로나 시대의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미국 뉴욕주 작은 도시 코닝(City of Corning) 입구 산 언덕에 세운  'Christ is the Answer' 대형 빌보드가 생각나는 숨가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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