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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믿음 (약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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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를 쓰게 된 배경과 저자 야보고는 누구인가요?
살아있는 믿음인 행함이라 함은?
행함 있는 믿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포함될까요?

어느 모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편지인 4권인 바울의 갈라디아서, 베드로의 베드로전서, 야고보의 야고보서 그리고 요한의 책인 요한1서입니다. 이 책들은 5장 정도의 양으로 서로 읽고 영적 독서 토론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 참여한 대부분이 가장 인기 있는 편지가 야고보서였다고 합니다. 이 편지인 야고보서는 어느 책보다 사이다 같아 가슴이 뻥 뚫리고, 쉽게 이해하기 쉽고, 현실적으로 더욱 필요하고 적응력이 강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전염병 비상사태 가운데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본문과 성경을 중심으로 믿음과 행동과의 관계, 행동하는 믿음에는 무엇이 구체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가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야고보서를 쓰게 된 배경과 저자 야보고는 누구인가요?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저자인데 그 당시 야고보라는 이름은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만 사도 중에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로서 그는 제일 일찍 순교했기에 어느 책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예수님의 친형제인 아고보입니다. 이 동생이 형님인 예수가 살아있을 때는 싫어했으나 부끄러워했으나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친형인 예수를 메시야,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고 12사도의 반열 중에 들어왔습니다.

 

그에게는 별명 3가지가 붙었는데 하나는 낙타무릎, 위인 즉, 정직하고 바르게 산다는 의미이고, 친동생이지만 아무리 베드로가 뛰어난 제자이었지만 그와 견줄만한 사람으로서 예루살렘교회를 끝까지 지킨 사람으로서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믿음이 있다고 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깨달은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믿음임을 마음의 받아들이고 지식적으로 인정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나 죄인도 여성도 쉽게 구원을 받고 의인이라 인정을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홀가분하고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이후 야고보가 믿는 성도들의 생활을 보니 엉터리요 말이 안 되는 것을 보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과연 정상적이고 건강한 믿음인가에 대한 회의를 하게 되었고, 정신이 없는 믿음, 영혼이 없는 믿음이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운전할 수 없는 면허증이 장롱면허증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라고 주장했던 사도 바울처럼 30년 율법 하에 살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다메섹에서 만난 이후에 ‘이신칭의’ 사상을 갖게 된 것과 비슷하게 생각한 사람이 루터입니다. 그는 수도사로서 삶을 살면서 수 십 년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죄를 짓지 않으려고 고해성사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기쁨과 평안이 없었던 상황에서 바울의 편지를 잃으면서 큰 깨달음과 공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편지 13권만 읽었고, 그러다가 야고보서를 보면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야고보서를 하찮게 생각하고 불필요하게 여기면서 그래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서신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행함이 있는 믿음 행동을 강조하면서 행함(행동)하지 않는 믿음을 야고보는 14절에 ‘유익이 없다’고 17절에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0절에 ‘헛것이라’고 26절에는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동의 중요성과 의미는 무엇입니까?

 

 

Ⅱ. 살아있는 믿음인 행함이라 함은?

 

행동은 믿음의 발로입니다. 그 중요한 행동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는 행위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진리의 믿음은 뿌리요 행위는 열매이기에 참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행위는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가 믿음의 열매인 까닭으로 우리는 그 반대로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행위는 결국 믿음의 진가를 판단하는 표준이 됩니다. 참 믿음이냐? 거짓 믿음이냐? 바른 믿음이냐? 그릇된 믿음이냐? 결국은 무엇으로 판단하겠느냐?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나무는 열매를 보아서 알게 됩니다. 열매인 행위를 보아서 우리가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보훈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행위를 보고 열매를 보아서 판단하라고 몇 번이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나무는 종류를 따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가 사과면 그 나무는 사과나무요, 열매가 배면 그 나무는 배나무요, 은행이 열리면 그 나무는 은행나무입니다.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압니다. 마찬가지로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줄 생각합니다.

 

셋째로, 행위는 최후 심판의 표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결국은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다 행위로서 판단한다고 성경에 말하였습니다.

 

  산상보훈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주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요한 이 요한1서 2장27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행위가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이제 도끼를 나무 뿌리에 놓았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다 찍어 불에 던지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Ⅲ. 행함 있는 믿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포함될까요?

 

믿음의 열매인 행동에는 구체적으로 포함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은 마음속에 긍휼, 연민 공감이 있습니다.

누구든 간에 공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16절에 예를 들면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상대방의 아픈 마음이 나에게는 아무런 공감된 감정이 없이 은행가서 돈 찾아, 병원 가서 치료 받아, 밥 잘 먹고 굶지는 말고, 따뜻하게 잘 자고 감기 조심하고 말을 하지만 전혀 마음에는 전혀 나와 상관이 없는 듯이 말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사람은 공감능력이 없고 긍휼이 없는 사람이다. 반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쓰는 인간미(휴머니즘)가 있다고 하는데 어울릴 줄 알고 분위기 맞춰주고 다른 사람이 기뻐할 때 기뻐해주고 슬퍼 할 때 슬퍼해 줄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동요를 하지 않고 아파도 죽어도 마음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세상 사람들은 인간미라고 하지만 즉 긍휼이 없는 것을 가리켜서 야고보는 믿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며, 마음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공감능력입니다.

 

둘째로 믿음은 사람들에게 차별대우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부자가 들어오고 화려한 자가 들어오면 좋은 자리를 내어 주고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해주고 난로 옆에. 에어컨 자리에 안내하지만 그러나 남루한 자나 가난한 자가 오면 본체만체 하거나 끝자리에 안내한 다든지 하는 것 이것은 그의 잘못된 처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차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을 제대로 잃었다면 무시하고나 차별대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동일하게 존엄하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믿음은 물질의 씀씀이와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믿음과 돈은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아주 밀접한 것을 알게 됩니다.

마트 가서 사 먹으세요, 병원에 가서 치료 하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도움인 돈을 주면서 내가 뭔가 희생을 하면서 돌봐주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돈을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절대로 돈 안내는 수전노 같은 사람 성격이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잘 쓰는 사람, 밥을 잘 사는 사람 풍성함 이 있어야 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밥 사주고 돈을 쓰는 것을 보면 믿음의 표현입니다.

사실 세상이 험악해서 교회에 돌아다니면서 그런 수법으로 하는 것도 위험한 것도 있지만요

그래서 루터는 진정한 회개는 돈지감과 함께 회개가 진짜 회개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수전노처럼 쌓아놓고 안 쓰는 것은 습관적인 것을 넘어 믿음의 문제입니다.

 

넷째로 믿음은 말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은 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통로입니다. 장로님의 믿음, 권사님의 믿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분의 믿음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자랑하는 말 허탄한 말을 하는 것 그리고 거짓말을 그리고 비방하는 말인데 이것은 성격이라기보다는 믿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진짜 말은 기도하고 찬양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플 때 고난을 당할 때는 기도하고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찬양할 것이요. 엘리야를 보세요. 어려울 때 기근의 때에 기도의 말로 하였습니다.

 

귀신의 믿음도 머리로 잘 알고 지식적으로 인정하고 공감할 있는 것을 귀신도 한 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머리로 지식적으로 알고 인정하고 가슴으로 떨고 있는 감정적으로 느끼는 믿음이 전부가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고 예배하고 충성하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예로 들면서 살아 있는 행동하는 믿음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고 믿음을 해석하였지만 그러나 야고보의 해석은 아니다 모리아 산에 올라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제단에 아들을 바칠 때 진짜 믿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하였지만 야고보는 정담꾼들을 대접하고 다른 길로 안전하게 갈 수 있게 한 것이야말로 진짜 믿음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려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귀한 믿음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처럼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 행동으로 표현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의 제단에 아들을 번제도 드리듯이, 라합이 정탐꾼을 숨기고 대접을 하여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한 행동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모습 속에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되 긍휼과 연민 그리고 공감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차별하지 않는 자세로 사람을 대하십니까? 물질의 쓰임이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십니까? 말에 대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의 모습이 있습니까?

 

행동하는 양심을 넘어서 행동하는 믿음의 모습으로 서로에게 유익을 주며, 세상을 밝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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