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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경주(히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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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경주할 때 목표인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고 합니다. 이는 똑 같이 시작하고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에 대하여 마지막에는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도 신앙생활이 우리 믿음의 삶을 달리기 경기를 하는 사람에 비유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경주자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말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3장에서는 자신도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선수처럼 온 힘을 다해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왜 히브리서는 믿음의 삶을 경기하는 자에 비유하고 있을까요? 히브리서는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배교의 유혹 앞에 서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아마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고, 박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가 분명하다면,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가 저 하늘나라가 분명하다면, 우리는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선수들처럼 끝까지 달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경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Ⅰ.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1).

 

본문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여기에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고 하십니다. 경주를 하려면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는 무엇에게 묶여서는 경기에 잘 할 수 없습니다. 경주를 잘 하려면 우선 몸을 가볍게 해고 몸을 만드는 것이 기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다양한 체력훈련이 필요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아마 본문은 큰 운동장에서 수많은 관중들이 경기하는 선수들을 응원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경기장에 가보십시오 축구 경기, 야구경기가 벌어지는 운동장에는 수많은 관중들이 모여 경기하는 선수들을 응원하고, 때로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격려합니다. 그것처럼 믿음의 경주에도 수많은 관중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서 하는 외로운 경주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경주에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사람들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관중들은 다 “증인들(μαρτυρων)”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우리 앞서서 이미 믿음의 경주를 먼저 했던 증인들(마르튀스)들입니다. 이 관중들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아브라함도 있고, 요셉도 있고, 모세와 여호수아도 있고,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이 믿음의 길, 믿음의 경주를 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경주를 방해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는 어떤 것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무거운 것’이란 혤라어로 ‘ογκον(옥콘)’이라고 합니다. 뛰는데 방해되는 ‘체중’, 혹은 ‘군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운동 경기하는 사람의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가서 자기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어떻게 경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을 체중을 조절하고, 군살을 빼야 합니다.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군살을 빼야 합니다.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모든 무거운 것들, 온갖 걱정거리들, 세상 염려, 거기에서 돈에 대한 욕심, 세속적인 욕망, 이런 것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 중에는 세속적인 욕망이 너무 강해서,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고, 또 세상 염려에 묶여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얽매이기 쉬운 죄’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란 헬라어로 'την ευπεριστατον αμαρτιαν(텐 유페리스타톤 하마르티안)'입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죄성, 혹은 습관적인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습관적인 죄, 남이 모르는 죄를 숨기고서는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없습니다. 죄는 우리를 얽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남이 모르는 은밀한 한 죄, 습관적인 죄에 묶여 자주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얽매이기 쉬운 죄는 어디에 갖다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해결해주는 곳이 이 세상에는 어디에서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죄를 몰래 숨기고 살다가 어느 날 다른 사람들 앞에 죄가 다 드러나게 되면, 그 수치를 견딜 수 없어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어떤 정치인은 스캔들이 터져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자살하는 연예인, 부자 집 며느리도, 심지어 대통령도 자살하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벗어버리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죄를 더 좋아하고, 때로는 죄의 맛, 죄의 즐거움을 즐기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무거운 것과 얽매인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요일1:7)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저와 여러분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주님께 다 맡기고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습니다.

   

 

Ⅱ. 경주할 때 목표인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2).

 

경주에 있어서 분명한 목표와 모델을 잘 봐야 합니다.  본문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가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믿음의 주’라고 할 때, ‘주’를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는 ‘αρχηγον(아르케곤)’입니다. 이 단어는 ‘시작하다’ ‘지배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주’란 ‘믿음의 창시자’, 곧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 ‘온전하게 하신다’는 말은 헬라어로 ‘τελειωτην(텔레이오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완수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온전하게 하시는 이’는 ‘완성하신 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신 분이시고 완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분만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 경주를 시작하신 분이고, 천국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까지 완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응원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목표는 아닙니다. 그들도 실수와 죄를 지었던 경우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he is author and perfecter"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광야에서 40년을 살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매일 만나가 위로부터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지 않으면 그들은 굶어야 했습니다. 매일 구름기둥, 불기둥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모세가 산에 올라가 손을 들어 이겼습니다. 기도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뱀에 물려 병들었을 때도 장대에 높이 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훈련을 40년을 거쳤습니다.

   

 

Ⅲ.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3).

 

장거리 경주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피곤과 낙심입니다. 노련한 마라토너도 도중에 포기하고 싶은 고비를 만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위기를 잘 견디면 끝까지 완주하게 되고 큰 성취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한마디로 피곤하고 낙심될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죄인들이 거역한 일을 당하고, 심지어 제자들까지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배신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같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텐데, 우리 주님은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는 교회에 나왔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고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예수 믿다가 힘든 일을 당하고는 결국 예수를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들도 힘든 일을 만날 수 있고, 중간에 ‘포기할까, 말까?’로 갈등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피곤할 때마다, 낙심될 때마다 예수님께서 참으신 것을 생각하고 참아내라는 것입니다.

 

한 건물의 입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할머니 얼굴에는 주름이 많고 옷차림도 허름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한번은 건물의 주인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시나 보죠? 표정이 항상 밝아 보여요.” 할머니는 웃으면서 “제 걱정을 트럭에 담으면, 아마 100대 분량도 더 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주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까?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까?” 그때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게 특별한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고통이 닥치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사흘을 생각하면서 사흘 동안 기다립니다. 그러면 사흘 뒤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해가 뜬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향해 달려가는 믿음의 장애물 경기를 하는 경주자들입니다. 위기인 장애물은 crisis는 위험과 기회의 의미가 있듯이 신앙의 경주를 마치면 영광이 있습니다(2, 빌2:8-10). 2절,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땅에서는 영화를 누렸으나 하늘에서는 고통을 당한다는 부자와 세상에서는 고통 가운데 살았으나 하늘에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안식을 누린다는 나사가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6).

 

영화중에 《마이웨이》(Winners, The/My Way)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1973년에 나온 영화입니다. 에밀 노팔(Emil Nofal)과 로이 서전트( Roy Sargent)가 공동으로 감독했고, 죠 스튜어든슨이 주인공을 맡은 영화입니다. 마라톤 선수 출신인 주인공은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뒤, 꽤 나이가 들었을 때, 젊어서 우승했던 마라톤 대회에 다시 도전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훈련과 연습을 한 뒤에 경기에 도전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힘에 부쳐 몇 번이나 쓰러집니다. 그래도 주인공은 포기하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립니다. 쓰러져서 숨을 헐떡이는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화면에 클로즈업되고,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할 때 배경음악으로 프랭크 시내트라가 부른 이 영화의 주제가, “My way”가 흘러나옵니다. “And now, the end is near… I did it my way” 참 감동적입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서 뛰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주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믿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넘어질 수 있고, 힘에 부치고 지칠 수 있어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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