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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김승규목사 설교>와서 조반을 먹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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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요한복음21:1-14 요절:요한복음21:12

(시사미래신문)

조창인 작가의 ‘가시고기’란 소설을 기억하십니까?

실제로 불치병 아이를 둔 친구를 소재로 썼다는 이 소설에는 한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감동적인 사랑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는 백혈병에 걸려 고통 중에 죽어가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신장과 한쪽 눈의 각막을 팔아 아들의 골수 이식 수술비를 댑니다. 아버지에게 버림을 당했던 아빠는 그 아픔을 아들에게 대물림하지 않고자 온갖 수고와 고생을 다해 아들을 살려냅니다.

 

그리고 자신과 아들을 버렸던 무정한 엄마에게 딸려 프랑스로 보내고 자신은 간암을 끌어안고 홀로 죽어갑니다.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다”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믿음없는 자에게 댓가를 요구한다면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둬가십시오.” “앞으로 아빠는 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아들아! 지금 난 죽어도 죽는 게 아니란다. 네가 살아있는 한 너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이란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사랑은 그 누가 뭐라 해도 아름답고 고귀하며 영원한 것입니다. 조건이 없고, 변함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이러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지만, 이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으십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이 변함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예수님의 품을 떠나있던 우리들의 모습이 있다면, 실패와 좌절 가운데 넘어져있던 우리들의 모습이 있다면 다시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여기서 '그 후'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연약하여 뿔뿔이 흩어져버린 제자들을 두 번이나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뭔가 되는 듯 싶더니 돌아서면 ‘도로아미타불’이었습니다. 정말 포기하고 싶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에 다시 한번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는 베드로의 말에 제자들은 일제히 따라 나섭니다. 베드로는 3년전 이 곳에서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 다시 3년후 다시 이곳에서 고기잡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배에 오르는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3년만에 던진 그물이었으나 결국은 또 빈그물이었습니다. 이제는 물고기조차 그를 비웃고 조롱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자로서도 실패하고 신앙도 실패했는데 이제 고기 잡는 그물질에도 실패하자 절망감이 몰려 왔습니다. 자꾸 옛날 생각에 “예수님! 예수님!” 하고 불러보지만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실패한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니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지난 3년 동안의 결과가 이 것뿐이란 말인가? 이 빈 그물처럼 허망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서러움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절망과 패배의 밤이 지나가고 새로운 희망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어슴푸레한 바닷가에 새벽바람을 맞으며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상처와 고통들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패와 아픔을 모두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다정하신 음성으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다고 힘없이 대답하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풍성한 사랑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처럼 도와주시고, 처음처럼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나 절망의 끝, 자학의 모퉁이에 있을지라도 거기까지 친히 찾아오십니다. 나를 택하사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십니다. 때로 우리가 주님을 놓쳐 방황하고 있을지라도 주님의 의로운 오른손은 언제나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세상 일에 실패했어도

 

2. 와서 조반을 먹으라

제자들이 신나게 물고기를 걷어 올리고 있을 때, 요한이 소리쳤습니다. “주님이시다” 요한은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무의식적으로 "겉옷"을 입고 무작정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베드로가 물살을 헤치며 저 바닷가에 서 계신 예수님을 향해 나아갈 때에 지난 3년 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오 주님, 이런 죄인을 다시 찾아오셨군요" 그의 눈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작은 배를 타고 주님을 향해 육지로 왔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피우신 빨간 숯불이 은은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숯불 위에 맛있는 떡과 생선을 못 자국 난 그 손으로 친히 굽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권능의 주, 만유의 주님께서 배은망덕하고 허물진 제자들을 위해 맛있는 아침밥을 친히 짓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빨갛게 타오르는 숯불을 바라보는 베드로의 마음은 찹찹했습니다. 은은히 타오르는 숯불 속에서 그는 며칠 전 대제사장의 집뜰 앞에서 숯불을 쪼이다가 너도 예수님의 제자냐는 소리에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한 그 일이 떠올랐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기억을 완전히 ‘format’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한 그 기억은 마치 불에 덴 화인처럼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기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마음을 아시는 듯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며 분위기를 바꾸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민망한 김에 얼른 가서 그물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민망했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기를 일일이 153마리까지 세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차라리 책망을 하신다던가, 아니며 회개금식 40일을 하라하면 마음이 편할텐데 예수님은 책망 한마디 안하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이해하시고 끝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떠한 죄와 허물 가운데 있을 지라도 "와서 조반을 먹으라" "와서 나의 은혜와 사랑의 조반을 먹으라"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못 자국난 손으로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한사람, 한사람 친히 먹여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맨 마지막에는 구석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베드로에게 다가가셔서 그의 입에 떡과 고기를 넣어 주셨습니다.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목놓아 울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배반한 죄의식에 눌리고, 실패와 절망감에 짓눌렸던 제자들의 심령에 이제 주님의 사랑이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벌이는 용서와 사랑의 Beach Party. 이것은 흡사 천국잔치의 모습이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이 예수님의 사랑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지 못하여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네.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의심하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에도 예수님은 변함 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정치도 변하고 인간의 지식도 변하고 유행이 변하고 도덕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나 질병이나 위험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을 찬양합니다.

 

3.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도 제자들처럼 연약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큰소리 쳤다가도 어느새 주님을 부인하고 물고기 잡으러 가는 허물과 약점이 많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도 사실 약점 투성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하면서도 어이없는 실수가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지만 기근이 들었다는 이유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불순종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 목숨 지키겠다고 자기의 아내를 누이라고 부르며 다른 남자의 품에 밀어 넣었던 치사하고 졸렬한 남자였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너에게 후손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지만 그것을 믿지 못하고 아내의 여종이었던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아브라함은 실수와 허물과 약점이 많았던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앞으로 오실 메시야 예수의 육신적인 족보의 조상이 되게 하셨으니 이로 볼 때 한 사람이 변화되거나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서만 되어 진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모세는 자기 성질을 참지 못한 채 사람을 때려죽이고 야밤도주했던 살인자였습니다. 그는 시내 산에서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던 거룩한 십계명 돌판을 집어던져 산산조각 내었던 혈기 방자한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지만 그는 성질을 이기지 못한 채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쳐 하나님의 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시면서 그의 체면을 세워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성군이었던 다윗은 알고 보면 너무나 허물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장군의 아내를 통해 자식까지 낳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여인의 남편을 전쟁터에서 고의로 죽게 만든 교활한 살인자요, 완전 계획살인을 저질렀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기에 침상을 적시며 통회자복 했고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다윗을 볼 때도 역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은 주님이 역사하시는 은혜의 자리요, 능력의 자리입니다. 주님은 재주 많고 강점이 많은 사람을 쓰시기 보다는 연약하고 약점이 많은 사람을 들어 써 주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의 약하디 약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가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 (고후12:9)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약점과 실수와 허물이 문제가 아니라 다시 일어나서 시작하려는 의지와 용기와 결단이 있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 손 잡고 일어 날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가와 손 내미시는 주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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