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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2025-10. 역사를 바꾼 카이퍼와 이승만(정성구, 킹덤북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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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외교의 귀재이기도 했지만, 예수로 꽉찬 연설가였다”

- (정성구, 킹덤북스, 2024, 104페이지).

(시사미래신문)

 

서평2025-10.
역사를 바꾼 카이퍼와 이승만(정성구, 킹덤북스, 2024)
2025년 7월 11(금)
배안호 선교사(영국) peterahbae@gmail.com

 

들어가는 말(서론):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유창한 영어 덕분’
“이승만은 외교의 귀재이기도 했지만, 예수로 꽉찬 연설가였다”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은 종교적 대립이다” (카이퍼) “나는 공산주의가 전 세계에서 가장 나쁜 전염병이라 생각한다” (이승만)


“오늘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정체성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이때, 하나님의 나라와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금 일어나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저자, 머리말)


<역사를 바꾼 카이퍼와 이승만>(정성구, 킹덤북스, 2024, 104페이지). 작은 책이지만 메시지는 묵직하다. 대한민국호는 지금 거센 풍랑으로 혼란스럽다. 금년 들어 지구촌은 엄청난 뉴스들로 갈피를 못 잡을 정도이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갖고 ‘’어떻게 생각’하며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카이퍼와 이승만은 10가지 면에서 서로 닮았다. 이것은 역사의 우연(偶然)의 일치일까? 필연(必然)이었을까?

 

정성구 교수는 40년간 총신대학교와 대신대학교에서 칼빈주의와 실천신학 교수와 총장으로 봉직했다. 현재는 총신대학 명예교수다. 한국칼빈주의 연구원과 ‘칼빈박물관’을 1985년에 세워 40년간 국제적 학술교류와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에 앞장섰다. 한국칼빈학회 창립멤버, 세계칼빈학회, 칼빈주의철학회, 국제복음주의협의회 등서 활동하였다. 무엇보다, 칼빈주의 학자일 뿐 아니라, 목회자요, 명설교가로서 500여회 부흥회와 40년동안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전국목사장로 기도회’를 45년간 23회나 주강사로 섬겼다.


<현암 정성구 박사 저작전집 30권> 등 82권의 저술, 12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한국교회설교사>는 10여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최근에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과 삶>이 독일어와 불어로 번역되어 독일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저자는 오래전부터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1986년부터 이화장에 드나들며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였다. 이승만 박사가 공부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곳을 수 차례 방문하여 자료를 모았다. 하와이와 워싱턴 3번 방문, 프린스턴 대학교와 신학교를 10차례 방문 자료 수집을 했다. “그러던 중에 카이퍼 박사와 이승만 박사는 정치가로서, 교육가로서, 저널리스트로서, 신앙인으로 상당히 유사점이 많이 있음을 깨닫았다” (머리말)
현암 정성구 교수는 명컬럼리스트다. 코로나 이후 수년간 카톡으로 매주 시원한 카톡컬럼을 쓰면서 신학교와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한국사회와 전세계 한인교포사회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본서는 그간 10만 카톡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글 ‘카이퍼와 이승만’ 제목의 글모음.
“카이퍼와 이승만” 주제로 발표했던 10회 연속 카톡컬럼의 제목들을 먼저 소개한다.

어학의 천재로서 카이퍼와 이승만/반공주의자로서 카이퍼와 이승만/저널리스트로서 카이퍼와 이승만/교육자로서 카이퍼와 이승만/연설가로서 카이퍼와 이승만/훌륭한 멘토를 둔 카이퍼와 이승만/회개의 사람 카이퍼와 이승만/정치가와 국제맨으로서 카이퍼와 이승만/사회개혁가로서 카이퍼와 이승만/기독교 입국자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10가지 중 7가지 공통점들을 (이 서평 독자들 위해) 간단히 요약하면서 서평을 할 것이다.

 

1. 어학의 천재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사실상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와 이승만(1875-1965)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의 시대가 완전히 다르다. 국적과 시대를 초월해서 두 사람은 완전히 빼 닮은 인생을 살았다. 두 사람의 중핵사상(中核思想)은 ‘위대한 칼빈주의자’였음을 서평자는 깨닫는다.
카이퍼가 네델란드 ARP 정당의 당수였을 때, 1898년, 워필드(B.B Warfield)교수는 그를 프린스턴 신학교의 유명한 ‘Stone Lecture’에 초청강사로 초청했다. 카이퍼는 ‘칼비니즘(Lecture on Calvinism)’ 주제로 한 주간 강의. 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신학과 세계관 강의로 인해 프린스턴 신학교에 새로운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유럽은 과학주의와 진화론 사상이 풍미하여 국가와 사회가 혼란스런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대안(代案)으로 카이퍼는 칼빈주의 사상과 이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카이퍼는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사상을 재건.부활시킨 단순히 정통신앙을 유지만이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다. 칼빈주의 핵심 사상은 구속주와 심판주로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이다. 1900-1910년대 프린스턴은 칼빈주의 사상으로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신학교서 1년간 공부할 때 간접적으로 ‘카이퍼의 사상’(칼빈주의)를 진하게 경험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프린스턴에서 변증학을 비롯한 신학과목들을 1년 공부했다. 당대의 칼빈주의 학자였던 B.B Warfield와 Geerhardus Vos의 설교를 들었다. 잘 알려진 대로, 짧은 기간에 학사/석사/박사를 끝내고 신학공부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어학의 천재’였기에 기능했다.
이승만은 유교와 불교배경 부모의 영향이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섭리로 기독교로 개종하었고 서양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그는 6년여 한성감옥 생활 중 영문법과 영어회화를 배웠고 영어사전을 만드는 열정! 마침내 그는 영어에 능통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웅은 하루 아침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영웅이 되려면 남이 알지 못하는 피나는 노력은 기본이고, 어학습득의 천재적인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한다. (중략) 우리 자유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언어의 천재로 말미암아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중략) 이승만의 유창한 영어로 국제 무대에서 외교를 통한 독립투쟁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 민국은 없다” (pp. 20, 21,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유창한 영어 덕분…)
아브라함 카이퍼도 역시 당대의 최고의 언어학자 - 히브리어/헬라어/라틴어/불어/영어/네덜란드어에 능통했다. 그는 대학에서 신학과 문학을 동시에 공부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웅장하였고, 연설과 글쓰기에 탁월하여 주간지와 일간지에 명컬럼 저널리스트로 당대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 반공주의자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이승만과 카이퍼는 당대의 최고의 지성과 학력/나라가 거의 절망에 빠졌던 것/명연설가요 설교가/나라와 민족을 깨우며 생명을 걸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면에서 닮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철저한 반공주의 노선에 서 있었다는 것이 또한 일치한다.
프랑스 혁명과 칼 맑스에 의해 촉발된 공산주의/사회주는 1917년에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공산당 나라가 되자, 온 세상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붉게 물들고 말았다. 상해 임시정부 안에서도 지도자들 중 상당수는 러시아가 보내준 사탕발림 루불화를 받은 지도자들이 수두룩 했다. 이승만은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지 6년 만에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무정부주의 자들임을 이미 간파하였다. 그는 이미 공산주의 문제점을 밝히는 소논문을 발표(1926)하였다. 일찍이 이승만은 “공산당은 호열자다. 인간은 호열자와 같이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카이퍼는 목사/신학자/대설교가/연설가로서 당 총재로 지냈고 후에는 수상이 되었다. 그가 소수 정당의 당수였을 때, 거대 당의 대표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에 해박한 뜨룰스트라(Mr. Troelstra). 그는 의회가 혁명을 예찬하고 맑스주의로 넘어가는 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카이퍼는 원래 연설의 달인에다가 웅장하고 논리적인 말을 통해서 왼손에는 포켓 성경을 들고, 사상은 사상으로, 논리는 논리로 대항하면서 뜨룰스트라가 이끄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을 하나씩 격파해가면서 자유 민주주의, 시장 경제, 기독 입국론을 세웠다” (p. 27)

 

3. 저널리스트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이승만과 카이퍼 두 사람은 처음부터 언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신문을 발간하고 대중매체를 통해 국민을 깨우는 운동에 힘썼다. 언론의 영향력을 일찍이 간파하였던 것이다.
카이퍼는 1872년 화란의 일간지 <더 스탠다드(Staandard)>의 편집인이자 주필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혁명이 인본주의 사상에서 출발했음을 알리며,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종교/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과학 등을 다루면서 1920년 임종까지 50년간 필봉을 휘둘렀다.
“한 사람이 50년 동안 일간지와 주간지의 편집주간으로 매일같이 논설과 칼럼을 쏟아내고, 거짓된 사상을 비판하고 국민의 갈 길을 제시했던 것은 확실한 기독교 세계관과 문장가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또한 논설과 칼럼은 곧 그의 칼빈주의 사상의 기반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일대기를 보면 ‘카이퍼는 그가 숨을 거두고 임종하는 순간에 손에서 펜이 떨어졌다’고 했다 (p. 30, 카이퍼는 일생 동안 크고 작은 223권-작은 도서관의 책을 썼다)
이승만도 역시 카이퍼와 견주어 봐도 손색이 없다. 당시 일제강점기에서 변변한 신문도 인쇄기도 없던 열악한 그 시절에 이승만은 <한성회보>, <매일신문>의 주필로 저널리스트로 고난 받는 백성들을 일깨우며 사정을 알리는 일에 힘썼다.
“더구나 옥에 갖혀 있는 동안 참 종이에 글을 써서 노끈을 만들어 옥 밖으로 내보내는 모험을 했었다. 특히 그가 쓴 <일민주의>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같은 책은 예언서가 되었다. 최근에 (밝혀진) 1942년에 단파 방송(VOC)을 통해 2300만 동포들에게 자유 소식, 자유 메시지는 80년 전의 라디오로 우리 국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었고 지금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이승만은 <워싱턴 포스트>, <타임지>, <데일리 뉴스> 등 언론을 이용할 줄 알았다” (p. 31)

 

4. 교육자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두 사람은 정치가로서 이상과 꿈이 비슷했다. 나라를 바꾸는 것은 교육밖에 없음을 깨닫았다. 카이퍼 시대의 유럽은 좌파들의 세상이었다. 과학주의/인본주의적 세계관이 만연하였다.좌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상을 가진 자들을 기용하고 신본주의 학자들은 설 땅이 없었다. 국립대학교수들이 좌파적 사상이 주류였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브러함 카이퍼는 이런 시대적 흐름에 맞서 1880년 개혁주의 자유대학(Universitat Libera Reformata)를 설립했다. 교수와 학생 각각 5명으로. 자유대학의 개교 이념은 그 유명한 ‘영역주권 사상(Souvereiniteit van Eigen Kring)’. 코끼리 위에 파리 한 마리가 앉은 격이었다. 네델란드 시민은 점차 카이퍼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가 추구하는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의 세계관으로 깨우치게 되었다. 한 사람의 결단으로 세계적 유명한 자유대학이 된 것이다.
“자유대학교에서 배출된 기독교적 석학들은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진을 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개교 140년이 지난 지금은 처음 개혁주의 정신이 다소 퇴조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정치, 법률, 신학, 철학, 문학, 역사, 공학, 의학, 물리학 분야에는 ‘그리스도 왕권을 귀중히 여기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중략) 그리고 카이퍼의 교육 개혁의 열정은 대학에만 그치지 않고, 사립 기독교 고등학교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사립학교 운동이 미국으로 건너가 기독교 고등학교, 기독대학이 많이 생겼다” (p. 36)
이승만은 왕을 폐하려는 운동에 가담했다가 6년여 감옥생활 중 그는 어학을 뚫어내고 다양한 책들을 탐독하여 실력가가 되었다. 선교사들로부터 기독교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사람들을 깨우치기 시작하였다. 옥중생활 중 죄수의 신분임에도 왕성하게 복음을 전하며 이후 교육사업에 올인하였다. 한인학교를 비롯 인천의 인하대학 설립.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의무교육 통해 전국민 문맹자가 없게 하였고 수 많은 국비장학생을 뽑아 미국에 유학 시켰다.

 

5. 연설가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100여년 전에는 사실상 연설과 설교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명연설가, 명설교가 일수록 수 많은 사람이 운집하였다. 미국의 마르틴 루터킹 주니어의 “I have a Dream”, 아브라함 링컨의 바연설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f the people”, 존 에프 케네디와 오바바 대통령의 연설을 우리는 기억한다.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 또한 연설과 설교의 명수였다. 그가 31세의 젊은 나이에 화란의 유명한 전직 수상출신의 후룬 봔 프린스터(Groen van Prineetere)의 후계자가 된 것도, 그의 감동적인 연설 덕분이었다.
“카이퍼의 연설의 요지는 “교육개혁 없이 나라가 바로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교육 시스템은 유물주의 진화론자들이 모든 교육 시스템에 똬리를 틀고 있었으므로 이애 대항하여 건전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교육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나라에 희망이 없다는 요지로 발을 굴리며 명연설을 쏟아냈다. 결국 카이퍼의 연설이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되었다. 카이퍼는 이외에도 각종 모임, 심포지엄, 세미나, 국회 연설에서 전 국민에게 호소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바꾸고 사상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어 갔다” (pp. 39, 40)
“이승만은 외교의 귀재이기도 했지만, 예수로 꽉찬 연설가였다”
이승만도 대중 연설가였다. 그는 평생 독립운동가로 살면서 설교와 강연이 일상이 되었다. 강연에는 또렷한 사상과 논리가 있어야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의 강연은 한결같이 조선의 독립이었고 조선의 대안은 ‘기독교’였다.
“이승만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뒤집어진 사람이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예수로 조선 민족이 새로워지는 것이 그의 꿈이자 메시지였다. 그는 외교의 귀재이기도 했지만, 예수로 꽉찬 연설가였다. 이승만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조선이 독립할 수 있고, 민족이 해방되는 것은 민족끼리 서로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면서 단합하여 일본을 물리쳐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그의 모든 연설과 설교에 녹아 있다 (중략) 사실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한민족을 계몽하고, 주미 한국인들을 설득하고 계몽하는 메시지를 늘 했었다” (pp. 40, 41, 이것은 모두, 프린스턴 신학교서 ‘기독교변증학’, ‘바울신학’ 등을 공부하였기에 그의 설교와 연설의 바탕은 언제나 민주주에 기초하는 기독교 신앙으로 결론지어졌던 것이다)

 

6. 정치가와 국제맨으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두 사람은 그 시대의 국제맨이었다. 글로벌 지도자가 되려면 출중한 어학 실력과 더불어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자적 비전을 겸비하여야 한다. 카이퍼와 이승만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몰락한 이조와 나라를 빼앗긴 채 망명하여 40년간 고생하며 지도자로 준비되었다. 그는 일본에게 빼앗긴 조선의 치욕을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호소하며 외교적 노력과 아울러서 자유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하였다.
이승만이 이렇게 국제맨으로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며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스위스 제나바 레만 호숫가 한 식당에서 만나 가정을 이룬 프란체스카 도너(Franziska Donner, 1900-1992)덕분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도나는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대학민국의 오른팔이 되어 크게 활약했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갈 때도 평생 썼던 타이프 라이터를 가져갔다.


“아직도 컴퓨터가 없던 시절, IT가 없던 시절의 그 타이프라이터의 모든 것이 외교문서였고 미국과 세계지도자들과 소통하는 이승만의 손과 입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건국이후의 외교에서 프란체스카 도너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p. 55)
카이퍼는 그렇게도 바쁜 일정에 참모들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서 D.L Moody 천막집회에 참석했다. 더구나 총선이 있던 해에 성령충만을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남유럽과 소아시아 지역을 순방하고 500페이지 분량의 두 권의 여행기를 남겼다. 카이퍼는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며 세계를 꿈꾸는 여행가였다. 미국은 물론 포루투갈, 스페인, 모로코, 튀니스, 수단, 이집트, 이슬람의 모든 나라, 헬라의 모든 나라였다. 네덜란드가 유럽의 중심국가가 되도록 터를 닦는 작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그의 시선이 어디를 보는가가 중요하다. 눈 앞에 있는 유익만 보려는 사람은 생각이 너무나 좁다. 사실 이승만 시대에도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은 대륙 세력이 유일한 줄 알고 중국과 구소련으로부터 무슨 지원과 경제적 유익을 보려 했지만, 이승만은 태평양 넘어 있는 미국과 유럽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는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바뀐다” (p. 57, 지도자의 시선이 한 개인/회사/국가의 미래를 결정함을 확인한다)

 

7. 기독교 입국자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이승만과 카이퍼는 지구 반대편에 살았지만 그들의 인물됨과 정치가/설교가/연설가/저널리스트로서 삶이 궤적이 많이도 닮았음을 확인하였다. 사람은 일생동안 누구와 만났는가? 누구의 사상을 접했는가에 따라서 인생이 방향이 완전히 정해지는 것이 정한 이치다.
아브하람 카이퍼(1837-1920)의 시대는 사상적으로 대혼란의 시대였다. 19세기, 20세기 초의 자유주의, 과학주의, 진화론으로 교육은 망가졌고, 특히 교회는 병들었던 때였다. 오늘 1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유럽교회는 중병을 앓고 있고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도 또한 그렇다.
교회 역사에서 유명한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t: 1618-1619)는 네델란드 도르트에서 개최된 국제회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한 구원/교회/신자의 삶이 명백히 규명된 회의. 그런데, 자유주의 운동의 진원지인 라이덴 대학의 교수들은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과 신앙 체계를 뒤엎고 새로운 신학을 발표했다. 본래 화란은 개혁주의의 중심이었다.
카이퍼는 그 자신이 확실한 칼빈주의자로 거듭나면서 새 교회를 담임하면서 교회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는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교회에 대해 강력히 대처하고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보존하는 교회를 세우자!”라고 역설했다. 결국 뜻을 같이 하는 목사들과 성도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 논선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카이퍼는 말 그대로 개혁교회(Gereformeerd Kerk)를 세우게 된다” (p. 66, 모든 성경적 교회는 개혁교회다)
여기서 교회만 개혁하는 것이 아닌,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에 개혁주의 사상을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의 개혁교회 된 교회 “재개혁교회”가 정확한 뜻이다. 카이퍼는 우리의 삶 전부가 성경적 세계관, 기독교적 세계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입국론’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처럼 땅에서도 이루지는 기독교국가 설립이 꿈이었다.
이승만의 꿈도 대한민국을 기독교적 진리위에 반듯하게 세우는 것이었다. 6.25 전란으로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부산 초량교회로 피난온 목회자들에게 나라를 위한 기도해줄 것을 요청을 하였다. 군대의 군목제도 만들어 군복음화와 민족복음화의 토대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한미방위조약를 체결로 오늘날의 한국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게 하였다. 사실상 이승만의 건국정신: 자유민주주의/한미동맹/기독교입국론/자유시장경제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기초한 것이었던 것이다.

 

나가는 말(결론): ‘두 사람의 중핵사상(中核思想)은 위대한 칼빈주의자가 공동분모’


“’칼빈주의’는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승만과 카이퍼는 시대를 초월하여 한 시대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음을 확인하였다. 서평자는 본서를 읽으면서 이승만이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년간 확실하게 역사적 칼빈주의를 공부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일제치하 국권을 상실한 조국의 독립위해 역사의 격랑(激浪)을 헤치며 마침내 대한민국을 굳건히 세운 건국대통령 이승만! 그는 1908년 프린스턴 신학교서 공부하며 확실한 성경적 세계관을 위에 나라를 세우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기초는 6년의 한성감옥에서 성령체험과 엄청난 독서와 영어 통달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가슴으로 받은 ‘칼빈주의’는 무엇이었을까 ? 한마디로 칼빈주의는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당 울타리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법조계 등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이 주인이란 ‘하나님 중심 세계관’이요, ‘성경 중심 세계관’이란 것이다.

 

이승만은 신학사(M. Div)학위는 없지만 당대의 최고의 교수진을 갖춘 프린스턴 신학교 학적부에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까지 배우면 신학의 핵심과목인 ‘기독교 변증학’, ‘기독교 윤리학’, ‘바울신학 연구’ 등 과목을 공부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B.A), 하버드 대학교(M.A), 프린스턴 대학( Ph.D)서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명석한 두뇌와 더불어 탄탄한 어학실력으로 최단기간(5년)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을 마쳤던 것이다.

 

서평자는 정치적, 사상적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운 이때에, ‘카이퍼나 이승만’과 같은 바른 성경관과 세계관을 갖은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감사하게도 106세의 연세에도 김형석 교수는 지금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메이저 언론에 정기적으로 컬럼을 계속 쓰고 계신다. 본서의 저자, 정성구 교수는 카톡으로 명쾌.상쾌.통쾌한 ‘시론 글쓰기’로 국내외 십 수만 독자들에게 바른 성경관/세계관으로 세상을 읽게 하고 있다. 본서를 읽으면서 서평자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정성구 교수는 여러 면에서 서로 닮은 꼴임을 확인하였다.


서평 후기:
서평자는 지난 봄 3,4월에 한달간 한국방문 중에 칼빈주의연구원과 칼빈박물관의 정성구 교수님을 찾아 뵈었다. 칼빈과 칼빈주의 희귀자료들, 교부 신학의 폴리갑,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등 초대 교부들의 원전이 16세기 구텐베르크 활자체로 찍어진 책들도 보관되어 있었다. 16세기 칼빈의 작품을 비롯해서 아브라함 카이퍼까지 칼빈주의 학자들의 서책, 그림, 문헌 자료들과 또한 한국교회사 희귀 자료들도 두루 살펴보았다. 벌써 5,6번째 방문이지만 볼때마다 감탄.감사가 절로 나왔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나의 여사의 자료들도 반가웠다. <역사를 바꾼 카이퍼와 이승만> 본서를 비롯 몇 권의 교수님의 저서를 선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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