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미래신문)
지난 토요일, 성남시 기독교 역사에 대한 포럼이 있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였다. 포럼이 끝난 후, 새성남 교회 김미란 사모로부터 100여 페이지 되는 소 책차를 선물로 받았다. 제목은 <Not Success, But Service>였다. 나는 이 제목에 필이 꽂혀 단숨에 책을 통독하고 이글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의 이야기는 독일 출신의 미국 선교사 서서평(Schepping)의 삶을 여러분들이 조명한 것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안나 쉐핑으로, 1880년 독일의 비스바덴(Wies-baden) 코브렌즈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하고 조선에서 숨을 거둔 여인이었다.

그녀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다. 1880년에 태어난 쉐핑은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어머니가 부잣집 가정부로 일하다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러니 그녀는 그의 태생부터 버려진 존재였고, 없어도 되는 아이로, 절망 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새 삶을 찾아 미국 뉴욕으로 떠나 버렸다. 어린 쉐핑은 가톨릭교도인 할머니가 돌보았지만, 거추장 스런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외할머니 마저도 쉐핑이 8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쉐핑은 자신을 낳은 엄마를 찾기 위해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이미 가족이 있는 엄마에게는 쉐핑이 짐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어린 시절 고된 노동과 고독 속에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유럽에서 온 낯선 이방인이었던 그녀는 바닥 인생에서 더욱 강인해져야 했고, 자립심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친구 따라 처음으로 개신교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쉐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말씀을 듣고 개종하게 된다. 그녀의 세계관은 복음으로 인해 변했다. 그는 쓸모없는 존재에서 사랑받는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날 이후로 쉐핑은 절망의 삶을 청산하고 복음을 가진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 쉐핑은 야간 노동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20대 초반 간호학교에 입학해 정식 간호사가 되었다. 그녀는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어루만지는 일이다’라는 것을 깨닫는다. 병자에게 말을 건네고, 외로운 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 때, 자신의 아픔까지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때, 미국 남 장로교로부터 조선에 시급히 의료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12년, 쉐핑은 남 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조선으로 향한다. 당시 조선은 의료 환경이 극도로 열악했고,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은 한심했었다. 하지만 쉐핑에게 조선은 선교지라기보타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그녀는 작은 예수로 살기로 했다. 주님을 따르되 철저히 따르기로 했다. 그녀의 이름은 조선어로 서서평(徐徐平)이였다. <천천히, 평온하게>라는 뜻으로, 서서히 낮아지고, 평온히 죽어가기를 스스로에게 서약했다. 그녀는 조선인과 함께 먹고 함께 입었다. 한복을 입고 검은 치마를 입으며, 검정 고무신을 신고, 꽁보리밥과 된장국을 먹으며, 조선의 문화를 몸소 체험했다. 그녀는 누군가를 도우려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진짜 조선의 여자로 변신해 가난한 자, 병든 자, 나환자들의 고름을 짰다.
서서평은 먼저 광주를 중심으로 간호업무와 복지 업무 그리고 여성 교육에 모든 삶을 드렸다. 그녀가 세운 <간호 양성소>는 수많은 조선 여성들에게 자립의 길을 열어 주었다. 서서평은 고아들을 모아 가르쳤고, 집이 없는 자들을 자신의 방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녀는 항상 낮은 자리에 있었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당시는 남편 있는 여인도, 홀로 된 여인도 조선에서는 실체가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서서평은 자신의 과거를 보면서 모두를 가슴에 품고,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서서평은 광주, 전주, 서울을 오가며 여인들의 간호와 교육, 복음 전도에 집중했다. 군산과 평양,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면서 주일학교를 세웠다. 서서평은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국민의 기본 교양과 소양을 익히는 계몽 운동도 하였다. 또 고아를 데려와 친자식처럼 키웠다. 그리고 서서평은 그의 사상과 삶을 꼭 빼어 닮은 강형신 전도사를 자신의 제자로 만들어 훗날 한일 장신대를 세웠다.
1934년 6월, 서서평은 여러 선교사들을 괴롭히던 스푸루 병에 걸리고 만다. 결국 과로와 영양실조로 쓸어졌고, 광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유산은 존경받는 명예도 아니었다. 오직 반쪽짜리 담요 한 장, 옥수수 한 홉, 돈 7전, 작은 성경책, 그리고 간호 가방뿐이었다. 그날 장례식에 온 조문객들은 모두가 <우리 어머니>라 불렀고,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했다. 그의 마지막 병상 머리맡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Not Success, But Service!>
그녀는 우리 같은 조선 사람을 깨우고, 치료하고, 가르쳤던 선교사였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강단은 성공 지상주의를 설교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개천에도 용이 난다!>라는 신념으로 자신의 성공만을 소원한다. 성공자만 위대하고 가진 자만 정의이고, 출세가 지상 목표인 우리나라, 우리 교회에 쉐핑, 서서평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Not Success, But Service!>가 가슴을 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