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미래신문)

나는 지난 주일, 60년 전에 개척했던 그 교회에서 낮 설교를 했었다. 이런 일은 참 드문 일이다. 내 나이 25세 때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 나는 농촌 개척교회를 시작했었다. 60년 전 총신 신대원 졸업반이면 서울에서 부 교역자로 일할 곳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장 낮은 자리인 농촌에서 개척교회를 해보고 싶었다. 그때는 가슴이 뜨거웠고, 겁이 없었다. 그리고 무모했다. 나는 박윤선 목사님이 세웠던 동산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였는데, 여전도회 후원으로 시작된 개척교회였다.
첫날 부임한 날은 수요일이었다. 그 교회는 전임자가 개척했다가 실패한 교회였다. 그러니 첫 번 개척교회보다 훨씬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재개척의 사명으로 열심히 사역했었다. 예배처라곤 블록으로 쌓아 올린 25평 정도의 맨바닥이었고, 바닥에는 가마니 두 어장이 깔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바닥에서는 꿉꿉한 습기가 올라왔다. 물론 전기도 없어서 램프를 몇 개 달아 놓았을 뿐이다. 그렇게 예배처는 한기가 돌았고, 모든 면에서 열악한 환경이었다. 동네는 50호 정도 사는 마을로, 토착민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교통은 열악해서 지금처럼 그 흔한 버스도 없어서 당시 미군 부대에서 폐차 직전의 스리코터에 드럼통을 망치로 두들겨 펴서 만든, 이른바 딸딸이 승용차가 유일했다. 또 사택이라고는 한 칸짜리, 그마저도 거의 한쪽으로 기울어진 낡고 작은 초가집이었다.
실패한 개척교회의 열악한 동네에서 재개척을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같았다. 지원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주는 사례금은 5,000원이었다. 그리고 쌀 한 말이 전부였다. 그 외에 전도 지원은 전무했다. 하지만 나는 첫 개척교회 열심에 늘 가슴이 뛰었고, 마을의 복음화를 위해 나름대로 가슴 앓이를 했었다. 우선 교인이라야 몇 사람 밖에 오지 않았지만, 주보를 만들었다. 교회의 역사를 위해서였다. 교인들도 별로 없고, 흙바닥에 냉기가 올라오는 예배처니, 교회를 지어 완성하는 것은, 나의 꿈이요 기도였다. 그래서 나는 백방으로 힘을 쓰던 중, 성도 한 분의 헌금으로 3평 정도의 마루를 만들어 겨우 5명 정도 앉을 수 있게 했다. 맨땅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드리는 것과 3평 정도의 마루라도 기가 막히게 발전한 것이었다.
나는 합판을 가지고 강단을 만들었고, 몇 안 되는 성도들 앞이었지만, 나는 수천 명의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듯 지금처럼 큰 소리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나는 고등공민학교를 만들어, 인근 부대 군인들 중에 대학 중퇴자들을 불러 모아 당시 형편상 중학교를 못 가는 아이들을 공부시켰다. 그렇게 공민학교를 돕던 병사들은 믿음이 생겼고, 학습과 세례까지 받았다. 후일 그들 중 목사가 한 명, 장로가 4명 나왔으니,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한 일이다. 나는 내친김에 ‘교회를 완성하리라!’ 결단하고,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인근 부대에서 철거하던 목재를 구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나와 몇 사람이 목수가 되기로 작정했다. 나는 아직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지만, 먼저 목수가 되어 <톱질> <망치질> <대패질> <페인트칠> 전문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젊은 전도자들에게 “목사가 되기 전 목수부터 되라!”고 말한다. 그렇게 개척교회 때 사역자는, 전도사, 목사, 집사, 사찰 겸 일인 다역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교회당에 마루를 깔고, 교인들이 앉는 장의자 15개 정도를 만들었다. 60년대 시골 개척교회에, 왠 의자냐 할 수 있지만, 그 마을에는 꿈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교회를 완공하고 당대 장로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인 이환수, 박찬목, 김성환 목사를 모시고 헌당식을 했었다.
나는 우리 동네 모든 사람들을 교인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면서 사역했다. 이제 알고 보니 어느 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현대 목회는 학습 받고 세례받은 교인만의 목회가 아니고, 마을 공동체 전부를 목회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3년간의 농촌 개척교회를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신 축복과 사랑과 은혜와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개척하면서 왕복 5시간을 총신 대학원(Th.M)을 다녔고, 학교에서 헬라어 강사로 시작한 것이. 평생 총신의 교수로, 총장으로 마감했다. 나는 농촌 개척교회를 뜨겁게 해 봤기에, 그때의 감격과 확신으로 교수 생활과 전국 집회에서 영적 감화력으로 복음을 외칠 수 있었고, 나는 그 개척 목회에서 <영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최근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교회에 잘 알려진 두 분의 목사님들을 압수 수색을 했단다. 그 두 분은 정부가 곁길 갈 때 크게 고함치지 못한 죄 밖에 없다. 정부가 알아야 할 것은, 대형 교회가 마치 불법의 온상인 듯 몰아가는 것은 공산당식 사고라는 것이다. 이 땅의 수많은 농어촌과 산촌, 그리고 도시의 후미진 곳의 개척교회 목사들이 10~20명 정도의 성도들과 함께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눈물 뿌려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그리고 정부가 목사들을 손보는 것은, 엄연한 <종교탄압>이다. 하기는 중국이나 북한처럼 공산주의자들의 걸림돌이 교회이니 무슨 명분을 세워서라도 탄압할 것이다.
교회 개혁자 요한 칼빈은 “목사에게는 두 가지 음성이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즉,
「순한 양들을 모으는 잔잔한 자애로운 목소리와 이리가 오면 고함치며 쫓아내는 분노의 목소리다」(칼빈, 목회 서신.p.296).
이도 저도 아니면 그는 벙어리다!